총구의 꽃잎
월촌중학교 1학년 성우진
나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창 밖에선 요란한 음악 소리와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이 종전 1주년 축제인 것을 잊었다. 나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집에서 뛰쳐나왔다. 저 멀리서 북소리와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늦진 않은 것 같다.
“벌써 종전한지 1년이나 됐네.” “그러게 말이야. 평화 조약 체결한 게 엊그제 같은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발 밑을 바라보았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전선이었다. 저기 심어져 있는 가로수는 원래 참호가 있었던 곳일 것이다.
지금 내가 딛고 있는 땅은, 죽은 병사들이 나뒹굴고 있던 흙바닥이었을 것이다.
둥둥둥. 북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들려왔다. 나는 웃고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무참히 죽은 곳이다. 나는 어쩐지 속이 메슥거렸다. 둥둥둥. 북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
저기 저 큰 바위는 전쟁통에 두 쪽으로 갈라졌다. 아마 수류탄 따위를 맞았을 것이다. 5년이 지났지만 바위의 상처는 그대로이다. 바위는 갈라진 틈으로 빗물이 스며 구멍이 뚫린 처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위는 여전히 묵묵히 서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저기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저 사람들은 모두 전쟁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돌아와서 웃고 있다. 나는 궁금하다. 피로 물든 손과 얼굴로 웃을 수 있는지.
거울을 보면 보이는 살인자에게 웃어줄 수 있는지. 적어도 난, 그럴 수 없다.
양심의 가책 따위가 아니다. 나는 내가 무섭다. 가족들을 버리고 혼자 적군으로부터 도망친 내가. 사람을 죽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내가. 어린 아이의 음식을 빼앗아 먹어 치운 내가.
둥둥둥. 북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질질 끌며 군인들의 행진을 보기 위해 큰길로 나갔다. 멀리서 군인들이 행진하며 오는 것이 보였다. 저 군인들은 자신이 원해서 행진을 하는 것일 거다. 전쟁이 끝나고 군은 더 이상 강제징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5년 전 아빠에게는 그런 배려 따위 없었다. 입영통지서가 날아온 날, 우리 가족은 다 같이 울었다. 아빠는 그런 우리에게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빠의 죽음과 함께 내 안의 아빠와의 추억들도 하나하나 사라져갔다. 전쟁의 끔찍한 구렁텅이 속에서 내 추억들도 빛바래고 찢겨나갔다.
이제는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조차 알 수 없다.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전쟁에 관련된 물건을 보면 얼어붙는 그런 나날들은 내 잘못일까?
처음 총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머리가 하얗게 질리는 듯 했다. 고막을 찢는 듯한 그 소리는 내 생각 위에 하얀 페인트를 들이 붓는 느낌이었다. 얼어 있는 나를 주변 사람들이 끌고 가줘서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끔찍했던 건, 총소리가 난 그 순간 쓰러지던 어떤 병사의 모습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총소리와 병사의 피가 섞이며 윙윙거렸다. 가끔,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되면 나는 그 기억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 가령 지난번 추수감사절 난 불꽃놀이 때문에 최악의 하루를 보냈다.
평화 조약이 체결된 날, 난 하루 종일 집에서 술을 마셨다. 납득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일을 고작 1달 만에 끝내다니. 내가 받은 고통은 고작 1달 만에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나에게서 도망칠 곳을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라를 위해서, 그 말 한 마디 때문에 우리는 고통 받아야 했다. 나의 상처와 아픔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전쟁은 허무하다.
둥둥둥. 북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행진하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붉은 제복을 입고 오와 열을 맞춰 행진하는 근사한 행렬이었다. 맨 앞의 병사가 나팔을 불자, 모든 병사들이 멈췄다. 그때, 한 병사가 총을 꺼냈다.
탕- 총의 날카로운 소리가 푸른 하늘을 채웠다. 총소리가 다시금 내 기억들을 난도질하며 불러왔다. 죽어가는 병사의 모습과 비명 소리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끊임없는 고통의 기억 속으로 빨려가며, 나는 발버둥 쳤지만 닿지 않았다.
그때 내 손등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톡, 소리와 함께 내 손등에 떨어진 건 꽃잎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고개를 들자 형형색색의 꽃잎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병사의 총에서 나온 것은 꽃잎이었다.
몸에 감각이 돌아왔다. 나는 떨어지고 있는 붉은 꽃잎 한 장을 잡았다. 전쟁이 끝났지만 고통스러운 기억은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기억을 품고 살아갈 수 있다.
형형색색의 종전의 기쁨과 함께.